What I want to say

갈등과 횡포

moonsix 2015. 9. 21. 10:15

갈등: 등나무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목표이해관계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함. 또는 그런 상태.

횡포: 제멋대로 굴며 몹시 난폭함.

 

분명 다른 뜻이다.

흔히 갈등이라 표현하는 상황들에 있어 용어 사용이 적합한지 한번은 따져보고 싶었다.

위에 인용한 것처럼 갈등의 사전적 의미는 분명 '다름'에 방점이 찍혀 있다. 서로간에 달라서 생기는 문제라면 그건 갈등이 맞다.

하지만, 한국에서 갈등이라 지칭되는 상황들은 서로 달라서 생기는 문제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이권과 금전적 이익을 목전에 두고 벌어지는 불합리한 힘의 과시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본인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 주변에 장애인 시설이 들어오지 못하게 난리치는 상황이나, 건물주가 제멋대로 세입자를 쫓아내는 상황들은 갈등 상황이 아니다. 한쪽의 횡포인 것이다. 갈등은 양쪽의 정당성이 대립하고 있으며, 이해관계의 차이점을 풀기 위한 합리적인 노력이 진행되고 있을 때 갈등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내가 몸담고 있는 어느 조직에서 서울시 지원사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근데, 이 사업에 대해 보도가 나가고 난 뒤, 올해 상반기 동안 잠시 몸담았던 어떤 민관 합동조직(동,주민자치위,상인회가 포함된)에서 자치구쪽으로 '이건 우리가 계획하던 사업이다, 왜 우리 조직 이름을 민간 추진단 명단에 마음대로 집어 넣었느냐'며 극심한 민원을 넣었고, 이는 아직까지도 사업 수행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들의 민원 제기 이후 자치구 담당 부서에서는 나를 불러 '왜 이런 상황을 만들었냐'는 식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이 상황을 '민간 갈등' 상황으로 표현했다.

사실, 그들의 민원 제기는 내 입장에서 정당하지 않다. 왜냐면, 그 조직과 함께 일을 도모하던 시절에 그들의 사업 계획 컨텐츠를 내가 다 작성해줬고, 실제 직접 수행한 적도 있었다. 물론, 사전에 협의 없이 추진단 명단에 그 조직을 수록한 건 실수가 맞다. 하지만, 이 사업은 광역 자치단체 중심의 사회적 경제 영역 사업이므로 그들 영역과 다를 뿐더러, 그들이 겹친다고 주장하는 올해 초 계획했던(사실 내가 직접 사업계획서를 작성해준줬던사업은, 현재 계획을 수립하고 진행할 인적, 물적 자원이 부재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구청에 민원을 넣고 소란스럽게 난리치는 것을 갈등이라 지칭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다. 

더군다나, 이 사업에 대한 보도를 접하고 문제가 있다 느꼈다면 사실 구청에 민원넣는 것과 별개로 사업의 수행주체인 나에게 연락을 해서 상황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했을 수도 있다. 전혀 그런 과정 없이 아직까지도 구청쪽에 압박을 가하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쪽과 이미 정해진 미팅약속을 어기면서 본인들 회의장소에 나와 해명하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현 상황들을 보면서 과연 문제 해결을 위해 합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활들을 행정이 아닌 민간에서도 '갈등'이라 규정한다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거버넌스-협치'에서 중요한 건 거버넌스의 양쪽 당사자 주체, 세력들이 얼마나 거버넌스 친화적 역량을 지니고 있느냐, 거버넌스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라 본다. 이러한 조건은 특히 민-민 거버넌스에서 더욱 중요할 것이다. 이에 더해 거버넌스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건 상대방에 대한 일방적 힘의 과시만을 무기로 횡포를 부리는 세력들에 '상생을 위해서'라는 면죄부를 부여하며 '갈등'이라 두루뭉실하게 상황을 무마시켜버리는 것이다. 불합리한 횡포에 대한 비판과 사회적 제재가 없이 그저 말뿐인 상생을 위해 한쪽이 일방적으로 분노를 집어삼키는 상황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행정이 행정편의주의적으로 횡포를 갈등으로 둔갑시켜버리려 하는 상황은 이미 익숙하다. 이에 대한 비판은 여지없이 행할 수도 있다. 민간의 경우는 좀 다르다. 한국인들은 '협력' 내지 '협동'과 합리적 토론의 경험이 없다. 거의 모든 경우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한 일종의 '정치'와 '목소리 큰놈이 이기는 세상의 이치'에 따라 살아온 이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경험과 역사들이 불합리한 횡포의 면죄부가 되어줄 수는 없다. 불편하더라도 그들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폭력적인지에 대해 비판하고 따져 물어야 한다. 그리고, 고민해야 한다. 과연 그런 이들과 상생해야 하는지.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려 하지 않는 이들과 상생하여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만약 어쨌든 세상은 진보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상생'이라는 만병통치약을 처방하기 이전에 '누구와의 상생'이고 '어떠한 상생'이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이 먼저여야 한다.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횡포에 맞서고 싸우는 것'이어야 한다. 그 이후에 우린 상생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꼭 상생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